요한 복음 21장 15절 - 17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12 제자를 부르시고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질문도 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신 다음에는 꼭 질문을 하여 얼마만큼 이해를 하고 받아 들였는 가를 확인하여 봅니다.
시험으로 확인하여 볼 때에도 있고 직접 한사람씩 불러서 물어 보기도 합니다.
마르다에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은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하시면서 믿음을 알아보는 질문도 하시었습니다.
바리새인과 대 제사장에게는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하시며 성경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질문을 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대표자인 베드로에게 질문하시었습니다.
이 질문이 바로 나에게 오늘 하시는 질문으로 알고 현명한 명답을 주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절 - 20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 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로 알고 있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이때에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자기가 경험하고 느끼고 배운 것을 대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어떻게 배웠고 예수를 내가 누구로 알고 경험하고 있습니까?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하나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리기 위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예수님의 행하신 능력과 기적과 가르치신 말씀과 친히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신 말씀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믿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였고, 이를 알고 믿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생명의 구주가 되심을 알고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알았으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 제사장, 나의 왕, 나의 선지자이십니다 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관자입니다 하는 고백이 나와야 구원을 그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듯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예수님에게 나의 죄를 매끼고 회개하고 내 대신 죄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말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르침대로 장차 살아가며 나의 인도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를 그리스도로 삼은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하는 사람이 사도 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디도서 1장 16절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실제로 고백하는 사람은 言行一致의 행함이 따라 오는 법입니다.
말로는 시인하고 행동으로는 부인하는 모순된 거짓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권자, 주장자, 나의 왕, 나의 제사장으로 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요, 나를 인도하는 선지자임을 항상 말과 행동으로 고백하면서 시인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세례 요한이라고 고백한 사람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준 선지자입니다. 예수를 제사장만으로만 본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죄 문제만 해결하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 제사장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1/3만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에서는 예수를 제사장만으로 섬기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엘리야로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선지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자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기적과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한번 기도하면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고, 다시 기도하면 비가 오는 기도의 능력이 있는 선지자입니다.
기도를 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고 불의 응답이 즉시 임하는 선지자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적의 주인공으로만, 아니면 제한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온전히 예수에 대하여 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예수를 엘리야로 잘못 생각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엘리야를 예레미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나라가 망할 때에 이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왕에게, 백성의 장로들에게, 일반 백성에게 간곡하게 권하여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저들이 듣지 않음으로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라는 말은 “여호와가 높여 준다”는 뜻으로 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왕으로만 모시려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어야겠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여 왕권을 포기한 예수를 은 30에 팔아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왕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왕으로만 세우려고 잘못 생각하는 자가 그 당시에도 많이 있었고, 오늘날도 예수를 왕으로
생각하고 그 왕권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주의 신학 사상과 자유주의 신앙가들이 이러함이 있는 예수를 예레미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 세례요한, 예레미야가 아니고, 이 모든 것이 합한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시오, 왕이시오, 제사장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온전한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는 고백을 올바르게 할 때에 주님께로부터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따르는 성도에게 칭찬이 임하는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든든한 반석을 가진 신앙인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은 나 지신이 스스로 알아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고백하며 믿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정통한 유대인의 랍비들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누구시라고 고백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는 정확한 고백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성령을 통하여 고백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장 47절 - 51절, 60절 - 7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보면 어려운 때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며 5천명, 만 명씩 떼지어 따르며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붕을 뜯고서야 예수 앞에 중풍 병자를 내려놓을 정도로 예수님의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오한 진리의 말씀을 하시며,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세상에 오신 구원의 목적을 향하여 가르치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세상에 오신 참 구원을 말씀 하실 때에, 모두 떠나갔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러한 말씀에 어렵도다 하며 주님을 따라 다니는 것을 중단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는 참 진리의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몇 명이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다른 욕심으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12 제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오리혀 예수를 잡아죽일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예수를 떠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를 떠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섭섭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초기에는 사도 바울의 기적과 이사와 전도에 많은 사람이 따르고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마 얻어 병을 고치려고 수많은 사람이 따랐지만 사도 바울의 말년에는 쓸 쓸 하였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 9절 - 17절 중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사도 바울을 모두 버리고 떠나고, 오히려 심히 대적하고, 해를 끼친 사람이 과거에 사도 바울을 따르던 사람이요, 이제 몇 사람의 진실한 제자만 남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사도 바울을 도와 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주님만이 곁에 서서 사도 바울을 강건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도 말기에도 모두 예수님을 떠나 버리더니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달라는 소리를 치는 무리가
되었고, 사도 바울을 따르던 자들이 사도 바울을 버리고 오히려 대적하고 해를 끼치는 무리가 된 것을 볼 때에, 필자도 이러한 섭섭함을 느끼는 때가 있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조금 읽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부흥 할 때에는 우리 목사님이 최고다고 말하며 모여들던 성도들이, 어쩐 일인지 은혜가 없다 하면서 모두 떠나 버릴 때에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중국 선교 9년을 마무리 지을 때에도 지금까지 목사님이 최고다 하던 자들이 말을 뒤집고 위협을 하는 자가 되는 것을 볼 때에 섭섭함이 있었지만,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요, 사도 바울이 가신 길이니, 전도자의 말기의 섭섭함과 서운함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에게도 가롯 유다가 있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알렉산더가 있었고 나에게도 이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섭섭한 마음으로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때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주님을 위로합니다.
요한복음 6장 67절 - 69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서 깨달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생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명이 아닌 다른 어떠한 나의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의 다수가 주님을 생명으로 모시기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민 정보를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L. A.에서 사업을 하려면 큰 교회에 나가야 하고, 그것도 두 세 곳에 이중 등록하고 있으면 더 좋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를 생명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버렸듯이 예수님도 저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고난의 때가 다가 와서 피와 살을 먹어야 할 때가 오면, 주님과 생명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중국의 문화 혁명도 그러했고 소련의 공산 치하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둘째로는 예수를 알고 난 후에 믿으려는 사람은 결국 예수를 떠나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예수를 알고 믿으면 잘 믿는 사람이 될 것 같지만, 절대로 예수를 알고 믿으려 하면 평생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께서 예수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성경 말씀을 믿으면 진리의 말씀이 깨닫게 되지만 예수를 알고 믿으려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사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위로 걸을 수 없고, 바다가 갈라져서 물이 벽과 같이, 어름같이 굳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생명의 주를 버릴 수 없나이다.
우리가 주를 믿고 알았는데 어디로 가오리까 하며 죽더라도 주님을 떠날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다가 포기한 사람들이 더 악한 사람이 되어 더 악하게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봅니다.
김일성이도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사람으로 어머니는 강반석 권사, 외삼촌은 강양욱 목사이며, 주일학교에서 자라서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배반하고, 북한의 모든 교회를 없애 버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반동으로 몰라서 죽인 것이 사실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팔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배반한 제자가 예수를 은 30에 팔은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도 예수 믿다가 포기하려느냐?”
예수님이 오늘 섭섭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질문하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같이 고기 잡던 친구들보다, 배나 그물보다 재산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네가 네 친척보다, 가족보다 네 재산 보다 네 자동차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질문합니다.
베드로는 그러하다 하외다 하면서 거리낌없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자는 목회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린양을 먹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세상의 물질, 가족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기를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두 번째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은 1:1의 질문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비교의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과 1:1의 사랑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목회자가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아시면서 왜 질문을 하였을 까요?
입술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기도를 우리가 왜 하여야 합니까?
주님께서 구하기 전에 있을 것을 다 아시지만 입술의 고백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 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사랑의 질문은 사랑이란 단어를 이 때에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아가페는 첫 번째, 두 번째의 질문에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네가 무조건 사랑하지 않고 조건이 있음으로 사랑을 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가페로는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내게 생명을 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필레오의 사랑으로 조건이 있음으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으니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 번째의 질문에 확실하게 주님께 대답하여야 합니다.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답이 베드로와 같이 나 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알았으니 주님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하는 대답이 나오도록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리:
예수님은 세 가지 질문을 오늘 나에게 던지십니다.
1.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 너도 떠나가려느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우리의 신앙 깊숙한 곳에서 베드로와 같은 답을 주님께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명확한 답은 아무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택한 사람만이 주님의 질문에 정답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질문에 대답을 잘 할 때에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 위에 세워지는 축복을 받은 것 같이, 우리도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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