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칼럼

멍에를 매고 배우라 (마태복음11:28 -30 )

빛에스더 2010. 1. 1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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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면 온통 스마트폰 이야기로 야단입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앞으로의 핸드폰은 통화 기능만 있으면 안되고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되어야 합니다. 애플사에서 아이폰이라는 전화기를 만들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니까 또 구글에서는 넥서스폰이라는 대항마를 만들고 국내 업체들도 여기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아주 분주합니다. 스마트폰 다음에 인기를 끌게 될 것은 자판이 없는 노트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터치스크린으로 책을 다운받아서 볼 수도 있고 또 PC로 쓸 수도 있는 그런 제품인데 이것이 출시되면 한해에 전 세계적으로 천만대 정도가 팔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그런 것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아랍 에미리트의 원전공사를 수주하면서 원자력 발전이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되지 않습니까.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이 그린 에너지의 대안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봅니다. 산유국인, 석유를 생산하는 아랍 에미리트가 원전을 짓기로 했으니 말 다했지요. 그러므로 앞으로 유망한 전공은 원자력 발전과 관계가 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핵물리학이라든가 또 원전개발과 관련된 전공이 유망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실용적인 것입니다. 실용이라는 단어는 이천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그런 개념입니다. 실용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되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뜨겁고 열심이 있더라도 그것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병든 사람을 한 사람도 고쳐주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고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소나 양이 안식일이 우물에 빠지면 건져주지 않겠느냐 하물며 아브라함의 딸이 귀신이 들린 것을 안식일에 고쳐주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배가 고파서 밀을 따서 손바닥에 비벼서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불법을 행하나이까’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이 배가 고플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본인도 먹고 함께 있는 자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하신 말씀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니라’ 이것은 그 당시에 파격적인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전통이든 제도든 율례가 아무리 열심히 있고 아무리 뜨겁더라도 결국 그것이 사람을 돕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광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치 않고 예수님도 그 위험성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실용적인 면은 특별히 이 시대에 정말로 귀중한 보배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슬람 종교의 과격함 때문에 종교의 무용론까지도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 다시 말하면 차라리 종교가 없는 게 낫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마당에 예수님의 참된 정신을 드러내는 신앙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에게 정말로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독교 신앙은 자발적인 신앙입니다. 자발적인 신앙, 그 말은 과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국가가 신앙을 강요할 수 없고 교회가 신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강요하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만일 강요하는 방법을 쓰신다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성령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셔서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게 하신 것은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감화 감동해서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원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섬기고 순종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로 믿도록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을 주셔서 내 마음을 감동하셔서 나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 믿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이고 믿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자유함입니다. 자유함.

예수님에게는 그 시대에 앞서가는 면모가 있었어요. 그 시대에 앞서 가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든 예수님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이천년 전보다는 지금이 더 쉽습니다. 이천년 전에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예수님의 그 모든 정신을 다 이해하고 실천할 만한 그릇이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여전히 사람들은 왕이 명령하는 대로, 부자가 명령하는 대로, 남자들이 명령하는 대로 마지못해 순종할 수밖에 없는 사회요 문화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발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이해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면서 살기에는 아직 시대가 준비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성경의 저자들도 예수님이 하신 것을 다 따라갈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셨을 때 성경 저자가 뭐라고 썼는지 아십니까.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 명을 먹였다고 했어요. 왜 그렇게 썼습니까. 그 당시에는 사람의 숫자를 셀 때 남자만 세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만 먹이신 게 아니고 여자와 아이들도 동일하게 먹이셨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귀중한 인격으로 여기셨어요. 여권이 발전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남자든 여자든 어린 아이를 다 먹이셨지만 성경 저자는 그것을 다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 명을 먹였다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쓴 사람조차도 예수님의 정신을 다 따라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임금의 횡포에 시달리고 부자의 횡포에 시달리고 또 남자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뿐만이 아니고 종교의 횡포에도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 말씀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면 인간의 스트레스라고 생각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직장생활을 하니까 이제 주말에 교회에 와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짐이나 멍에라는 말은 율법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율법의 무거운 멍에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과연 몇 교회나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초청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복음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율법을 가르칩니다. 은혜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으려면 이걸 해야 되고, 저걸 해야 되고, 기도를 해야 되고, 헌금을 해야 되고, 무엇을 해야 되고, 그래야 복을 받고, 그래야 면류관을 받고, 이런 식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율법을 가르치고, 믿음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실제는 행함을 가르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럼 할 필요도 없고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얘기냐 그게 목음의 내용이라는 얘기냐, 그건 아니지요.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 가야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죄인도, 또 무슨 사연이 있을지라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멍에를 지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실존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지면서부터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배워도 못 배우느냐. 예수님의 멍에를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진다는 말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분의 종이라는 얘기입니다. 소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처럼. 그런데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렇게 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쉼을 얻습니다. 그 이유는 비로소 우리의 주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우리 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멍에가 쉽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기쁜소식교회  김영준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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