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세계에 유대인이 1,500만 명 정도 있다.
그 중에 이스라엘에 600만 명, 미국에 700만 명이 있다.
이들 중 유대교를 신앙으로 믿는 사람들은 20%가 안 된다.
나머지는 유대인으로서의 전통을 받아들인다.
유월절, 초막절 등의 절기를 지키지만 종교적 의미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전통적으로 가족이 모여 함께 지내는 기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설이나 추석에 반드시 제사를 하지 않아도 가족이 모여 함께 지내는 전통과 비슷하다.
기독교는 200여 년 전에 자유주의 신학이 나온 이후로 역사적 예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슈바이처 박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신학을 포기하고 의학을 공부한 후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봉사하며 지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유대인들은 예수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인들 사이에 있는 일반적인 가르침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메시아는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전도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애를 쓰지만 전도가 거의 안 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대해 잘 안다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긴다.
왜냐하면 성경(그들에게는 구약만이 성경이다)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고, 그들만큼 히브리어를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전도를 하러 가면 성경 구절을 그들만큼 읽지 못하고, 해석하지 못한다는 것을 비판하며, 그렇게 성경을 잘 모르고 신앙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기독교인들은 그 점에 대해 대개 수긍하고 전도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내가 히브리어를 배우기 위해 만나본 유대인들 중 한 명(편의상 요나라는 가명을 쓰도록 하자)은 자신이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현대 히브리어와 성경 히브리어는 발음과 사용하는 단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성경 히브리어를 토대로 현대 히브리어를 만들었지만, 될 수 있으면 일반적 규칙에 맞도록 언어를 수정하였고, 성경에 빈도가 높지 않은 단어는 현대적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 자료를 가지고 성경을 볼 때 발음이 달라서 혼동을 갖게 된다.
이런 점을 요나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요나와의 대화중에 성경 구절의 해석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한 에피소드를 들어주고 하나님께서 그때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섭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입장과 당시 사건의 배후에 대해 설명해 주니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대단히 깔끔하고 일관성 있으며 논리적인 설명이라고 인정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기가 성경에 대해 잘 안다는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성경에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그 이야기가 역사적, 섭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가나안 전쟁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역사가 하나님의 실제적인 계획의 그림자를 보여주신 것이라든지, 모세 시대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하나님의 역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그 중에 하나는 메시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메시아라는 개념이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많은 기독교 학자들도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있었던 기간에 그곳의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 메시아 개념이 생겼다고 여긴다.
그래서 요나에게 시편 2편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곧 메시아이다. 그 시편은 적어도 3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바벨론 유수보다 400년 이전인 것이다.
그것을 보고는 자기주장을 접었다.
또 모세 시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른 집은 화를 면했는데, 그것이 예수님과 그의 피에 관한 예언이라는 설명을 주었다.
단지 그렇게만 설명하면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려가라고 했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심으로 결정을 돌이키는 일이 10번이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하자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더니 일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써 마지막 재앙이 예수님에 관한 그림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되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모세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사실은 모세 시대 재앙을 내리실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대화중에 나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을 징계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또 영적 사건의 그림자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삭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또한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의 산에서 번제로 바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자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도록 하실 것의 그림자였다.
예루살렘이 있는 시온 산이 바로 모리아 땅에 있는 산인 것이다.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장소다. 그래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4천 년 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메시아가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육의 세계에서가 아니고 나중에 마귀를 멸망시킨 후 모든 사람들을 심판한 이후라고 설명해주니 더 이상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나는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앙의 관점이 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하더라도 자기 생각을 전부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사고 체계를 뒤집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많은 대화 가운데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버려야만 할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요나는 바쁘게 살 뿐 아니라 외국 여행도 다녀서 자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해석이 얼토당토해서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논리적으로 보면 정말 깔끔하고 재미있는(fascinating) 설명이라고 했다.
요나와의 경험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배경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배경이 잘못된 지식에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감추어두신 비밀이 많아서 인간이 스스로 읽어서 그 배후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은 마귀에 대해 감추어두신 비밀이기 때문이다.
신인 마귀도 알지 못하는 것을 인간이 읽어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배경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기 전부터 하늘군대를 배출할 방법을 강구하시고 현재까지 4천 년을 일을 하고 계신다.
그 섭리에서 예수님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통해 인류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생명수 샘물을 만드셨고, 이 시대에 이긴자를 통해 그 실질적인 역사를 하고 계신다.
인간에게는 100년에 걸친 일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 4천 년에 걸친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을 듣지 않고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보내심을 받은 자가 없이 어떻게 진리를 듣고 이해하겠느냐고 하였다. 흔히 신앙에 대해 미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특히 바울이 신앙은 하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해서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늘에서 선물로 주신 사람만 신앙을 갖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감추어두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 지식만으로 읽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전해주는 자를 만나야 한다.
그를 통해 듣고 이해를 해야 믿어지고, 믿어져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4천 년 동안 감추셨다가 이제 그 비밀을 이긴자를 통해 밝혀주셨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그러니 진지하게 체계를 배움으로써 이긴자의 가르침이 성경적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지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가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자들을 데려가신다. 그러므로 먼저 그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육부장 윤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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