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우편 강도가 예수님께 부탁한 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나를 봐 달라, 나를 배려해 달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원어를 보면 나를 기억해 달라는 뜻입니다. remember me-나를 기억해 달라. 예수님도 이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성찬식을 행하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할 때 사용하셨던 똑같은 단어입니다. remember me.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뜻으로 오늘 본문을 읽으면 의미가 조금 달라집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일을 위하여 나를 생각해 달라는 뜻뿐만이 아니고 죽음 이전의 지금까지 나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나를 기억해 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이후에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내 맘에 들지 않는 옷을 내버리는 것처럼, 오래된 사진을 내버리는 것처럼, 철지난 옷을 내버리는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내버리는 것처럼 우리가 죽을 때 이 땅에서의 삶을 그냥 내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고 해서 믿음 이전의 삶, 천국 이전의 삶, 이 땅에서의 우리의 존재의 흔적을 그냥 지워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삶은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만일 다 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 아이를 그저 천국으로 환송하고 잊어버리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소중한 추억, 고인에 대한 기억, 사랑의 흔적, 그것처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외국에 가면 우리나라의 현충일 같은 날을 뭐라고 부르느냐면 memorial day-추모의 날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돌아간 장병들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또 외국대학을 가보면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건물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아예 대학교 이름을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 멜론 ․ 콜게이트 ․ 에모리,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대학 이름인데 이것은 대학에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의 이름을 추모해서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개 메모리얼 홀 이런 식으로 기부한 사람은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겠다는 뜻이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돈을 많이 기부해서 자기의 이름으로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연예인처럼 그레이스 켈리처럼 존 레논처럼 유명해져서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강도는 살아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어요. 소외됐어요.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어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쳐다보고 그를 알게 된 일이 언제냐. 역설적이게도 그가 사형당하는 날이에요.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알아보지 않다가 유일하게 그를 바라보고 그를 주목하는 순간이 언제냐. 사람들 앞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형당하는 순간이니까 얼마나 인생이 불공평합니까. 신문에 가끔 범행을 저질러서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범행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다가 무슨 일을 저지른 다음에 그때 그들의 이름이 유명해집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순이요 불공평함입니다. 리 하비 오스왈드라든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을 모든 사람이 아는 이유는 그들이 위대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유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강도는 거기의 모든 구경꾼들에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니고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 말은 ‘내가 일평생 나쁜 짓만 하고 살다가 이렇게 죽는데 이제 죽고 나면 누가 나를 그리워하고 누가 나를 기억하겠습니까. 나는 잊혀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은 지워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더라도 나쁜 사람으로만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당신만큼은 나를 기억해 달라,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달라는 뜻뿐만이 아니고 이렇게 끝나는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찾아 달라, 의미를 부여해 달라는 요청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탈출을 보면 수십 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할아버지가 돼서야 출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출감하고 나서보니 세상은 많이 달라졌어요. 자기가 옛날에 알던 세상이 아니에요. 옛날에는 말이 끄는 마차가 길을 다녔는데 이제는 자동차들이 길을 다니고 함부로 길을 건널 수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됐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옛날 친구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숨을 거두고 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벽에 이런 글귀를 새깁니다. ‘레드가 이곳에 살았다’ 레드는 그의 이름이에요. 초라한 한 글귀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자기가 죽더라도 슬퍼하는 사람도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비록 나무의 글이라도 누군가가 내가 여기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함이에요. 누가 그의 벗이 되어줄 수 있느냐.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누가 내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도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서 좀 불만스럽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 대해서 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후의 일을 너무 강조하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어떤 분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얼마나 사랑을 받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었느냐에 대한 그런 추억은 나누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천국 가신다는 것만을 강조하려는 기독교 장례문화에 대해서 이것은 철학의 부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례는 고인을 천국으로 보내드리는 것뿐만이 아니고 고인의 삶을 기억하는 순간입니다. 고인의 삶을 추억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정서는 누가 손님이 찾아올 때 ‘어서 오세요.’ 어서 오시라고 인사하고 떠나실 때는 ‘천천히 가세요.’라고 하지 빨리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우리가 누구를 떠나보낼 때도 빨리 보낼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이것이 우리의 정서인데 기독교인들은 빨리 보내려고 합니다.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고인에 대한 예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별세하신 어느 목사님의 빈소에서 동료 목사님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등대지기. 고인이 이 세상에 사실 때에 등대지기와 같았다는 취지에서…. 저 등대를 지키는 거룩하고 고귀한 마음, 이건 찬송가가 아니지요. 그러나 고인을 추모하면서 부른 노래인데 이것이 사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 사람만이 이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사람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를 느낍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 이 세상에 내가 설 곳이 어디냐. 이건 우리가 나이와 상관없이 묻는 질문입니다.
1950년도에 개봉된 영화가 있었지요. 젊은이의 양지라고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으로 나온 a place in the sun-젊은이의 양지. 제목이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그런데 영화 내용을 보면 젊은이가 거할 수 있는 양지가 없습니다. 음지에 사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에 설 곳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은 너무 차갑고 너무 어둡고 너무 고독하다, 이게 이 영화의 내용인데 본문의 이 강도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에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도 지금 십자가에서 돌아가는 순간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이 사람을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인간의 아픔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영광만을 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즘에는 부자의 아들이든 재벌의 아들이든 국가원수의 자식이든 그저 호강하고 영광만을 누려야 되는 것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와 같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강도와 같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강도가 말하기를 ‘예수여 주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계시지만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는 날이 옵니다. 고난 끝에 낙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고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좇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영광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그 가는 길에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들처럼 징계하신다고 했어요.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낮아지게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낮아지게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하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강건하게 만드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시련 없이 믿음의 사람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 ․ 야곱 ․ 다윗 ․ 바울이든 어느 누구든 시련 없이 믿음의 도를 배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시련으로 시작해서 시련으로 끝났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이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들 모두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길로 가는 데에는 시련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도 지금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강도는 자기도 이런 시련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는 날이 온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 안에 있을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실 수만 있다면 나도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나도 주님과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제가 옛날에 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라는 수도원에서 젊은이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찬송가의 가사가 굉장히 단순합니다. 똑같은 가사를 되풀이해서 부릅니다. 그 가사가 바로 이 강도가 한 말입니다.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그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데 아, 아마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죄인이 하나님에게 아뢸 수 있는 유일한 기도 제목이 이것이 아닐까….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나라, 이 영광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 낙원이 어디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거두든 인기를 얻든 돈을 벌든 행복을 추구하든 예수님 없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는 성공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고 예수님이 없는 부귀는 나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없는 행복은 나를 세상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든 건강이든 돈이든 예수님과 함께. 교회도 예수님과 함께 부흥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비로소 이 사람은 자기의 설 곳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이 설 수 있는 곳을 제공하시고 ‘나와 함께 네가 천국에 낙원에 있으리라’ 나이 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그들이 거할 곳이 어디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이후에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내 맘에 들지 않는 옷을 내버리는 것처럼, 오래된 사진을 내버리는 것처럼, 철지난 옷을 내버리는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내버리는 것처럼 우리가 죽을 때 이 땅에서의 삶을 그냥 내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고 해서 믿음 이전의 삶, 천국 이전의 삶, 이 땅에서의 우리의 존재의 흔적을 그냥 지워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삶은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만일 다 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그 아이를 그저 천국으로 환송하고 잊어버리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소중한 추억, 고인에 대한 기억, 사랑의 흔적, 그것처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외국에 가면 우리나라의 현충일 같은 날을 뭐라고 부르느냐면 memorial day-추모의 날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돌아간 장병들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또 외국대학을 가보면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건물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아예 대학교 이름을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 멜론 ․ 콜게이트 ․ 에모리,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대학 이름인데 이것은 대학에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의 이름을 추모해서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개 메모리얼 홀 이런 식으로 기부한 사람은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겠다는 뜻이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돈을 많이 기부해서 자기의 이름으로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연예인처럼 그레이스 켈리처럼 존 레논처럼 유명해져서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강도는 살아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어요. 소외됐어요.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어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쳐다보고 그를 알게 된 일이 언제냐. 역설적이게도 그가 사형당하는 날이에요.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알아보지 않다가 유일하게 그를 바라보고 그를 주목하는 순간이 언제냐. 사람들 앞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형당하는 순간이니까 얼마나 인생이 불공평합니까. 신문에 가끔 범행을 저질러서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범행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들을 알아주지 않다가 무슨 일을 저지른 다음에 그때 그들의 이름이 유명해집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순이요 불공평함입니다. 리 하비 오스왈드라든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을 모든 사람이 아는 이유는 그들이 위대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유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강도는 거기의 모든 구경꾼들에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니고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 말은 ‘내가 일평생 나쁜 짓만 하고 살다가 이렇게 죽는데 이제 죽고 나면 누가 나를 그리워하고 누가 나를 기억하겠습니까. 나는 잊혀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은 지워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더라도 나쁜 사람으로만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당신만큼은 나를 기억해 달라,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달라는 뜻뿐만이 아니고 이렇게 끝나는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찾아 달라, 의미를 부여해 달라는 요청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탈출을 보면 수십 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할아버지가 돼서야 출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출감하고 나서보니 세상은 많이 달라졌어요. 자기가 옛날에 알던 세상이 아니에요. 옛날에는 말이 끄는 마차가 길을 다녔는데 이제는 자동차들이 길을 다니고 함부로 길을 건널 수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됐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옛날 친구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숨을 거두고 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벽에 이런 글귀를 새깁니다. ‘레드가 이곳에 살았다’ 레드는 그의 이름이에요. 초라한 한 글귀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자기가 죽더라도 슬퍼하는 사람도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비록 나무의 글이라도 누군가가 내가 여기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절대적인 고독함이에요. 누가 그의 벗이 되어줄 수 있느냐.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누가 내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강도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서 좀 불만스럽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 대해서 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후의 일을 너무 강조하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어떤 분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얼마나 사랑을 받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었느냐에 대한 그런 추억은 나누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천국 가신다는 것만을 강조하려는 기독교 장례문화에 대해서 이것은 철학의 부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례는 고인을 천국으로 보내드리는 것뿐만이 아니고 고인의 삶을 기억하는 순간입니다. 고인의 삶을 추억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정서는 누가 손님이 찾아올 때 ‘어서 오세요.’ 어서 오시라고 인사하고 떠나실 때는 ‘천천히 가세요.’라고 하지 빨리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우리가 누구를 떠나보낼 때도 빨리 보낼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이것이 우리의 정서인데 기독교인들은 빨리 보내려고 합니다.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고인에 대한 예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별세하신 어느 목사님의 빈소에서 동료 목사님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등대지기. 고인이 이 세상에 사실 때에 등대지기와 같았다는 취지에서…. 저 등대를 지키는 거룩하고 고귀한 마음, 이건 찬송가가 아니지요. 그러나 고인을 추모하면서 부른 노래인데 이것이 사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든 사람만이 이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사람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를 느낍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 이 세상에 내가 설 곳이 어디냐. 이건 우리가 나이와 상관없이 묻는 질문입니다.
1950년도에 개봉된 영화가 있었지요. 젊은이의 양지라고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으로 나온 a place in the sun-젊은이의 양지. 제목이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그런데 영화 내용을 보면 젊은이가 거할 수 있는 양지가 없습니다. 음지에 사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에 설 곳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은 너무 차갑고 너무 어둡고 너무 고독하다, 이게 이 영화의 내용인데 본문의 이 강도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에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도 지금 십자가에서 돌아가는 순간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이 사람을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인간의 아픔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영광만을 누리지 않으셨습니다. 요즘에는 부자의 아들이든 재벌의 아들이든 국가원수의 자식이든 그저 호강하고 영광만을 누려야 되는 것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와 같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강도와 같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강도가 말하기를 ‘예수여 주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계시지만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는 날이 옵니다. 고난 끝에 낙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고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좇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영광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그 가는 길에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들처럼 징계하신다고 했어요.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낮아지게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서 우리를 낮아지게 하십니다. 아픔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하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강건하게 만드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시련 없이 믿음의 사람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 ․ 야곱 ․ 다윗 ․ 바울이든 어느 누구든 시련 없이 믿음의 도를 배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시련으로 시작해서 시련으로 끝났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이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들 모두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길로 가는 데에는 시련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도 지금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강도는 자기도 이런 시련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적어도 예수님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는 날이 온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 안에 있을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실 수만 있다면 나도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나도 주님과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제가 옛날에 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라는 수도원에서 젊은이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찬송가의 가사가 굉장히 단순합니다. 똑같은 가사를 되풀이해서 부릅니다. 그 가사가 바로 이 강도가 한 말입니다.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그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데 아, 아마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죄인이 하나님에게 아뢸 수 있는 유일한 기도 제목이 이것이 아닐까….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나라, 이 영광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 낙원이 어디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거두든 인기를 얻든 돈을 벌든 행복을 추구하든 예수님 없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는 성공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고 예수님이 없는 부귀는 나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없는 행복은 나를 세상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이든 건강이든 돈이든 예수님과 함께. 교회도 예수님과 함께 부흥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비로소 이 사람은 자기의 설 곳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이 설 수 있는 곳을 제공하시고 ‘나와 함께 네가 천국에 낙원에 있으리라’ 나이 든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그들이 거할 곳이 어디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 기쁜소식 교회 : 김영준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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