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칼럼

예수님이 칭찬한 사람 (마태복음 8 : 5-13) 김영준 목사님

빛에스더 2010. 8. 1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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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예수님의 사상에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도 급진적이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용도를 찾지 못합니다. 대충 급진적이라면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올 법도 한데 하도 급진적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건 우리의 생각과 같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너희 오른손이 너희를 범죄케 하면 찍어 내어버리라’는 말씀. 이것은 죄와 유혹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 사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건 굉장히 급진적인 말씀이지만 이건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예수님만의 사상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든 사회주의 국가든 만일 이 말씀대로 실천한다면 잘라버려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썩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에요. 만일 이 말씀대로, 문자 그대로 실천한다면 우리 가운데에서 손도 없고 눈도 없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니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어요. 인간의 수많은 자선활동이 예수님을 좇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도 해야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고로 예수님이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현금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시장을 전제한 것입니다. 시장이 있어야 소유를 팔고 살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보다 더 급진적인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자가 있다’ 이 말씀은 주일 설교 본문으로 자주 인용되지 않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성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 즉시 할렐루야로 화답하지 않습니다. 즉각 지지의 입장을 표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내에서도 저마다 짝을 찾지 못해 야단이고 저마다 결혼이 최고의 행복이요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독신으로 사는 것과 스스로 고자가 되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급진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진보로 분류할 수도 없고 보수로 분류할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반대로 예수님의 사상에는 보수적인 생각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히 하려 함이로다’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전통이요 과거요 유산입니다. 개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외치고 전통과의 단절을 외치고 과거는 나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자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적인 전통과 율법과 선지자를 부인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것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율법과 선지자 중에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 개인의 운명의 궁극적인 책임이 개인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건 남을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탓할 수 없고 부모를 탓할 수 없고 하나님을 탓할 수 없고 운명이나 팔자나 운을 탓할 수 없습니다. 사람 하기 나름이에요. 며칠 전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어느 고등학교에 가서 이와 비슷한 연설을 했는데 오바마가 믿음의 관점에서 말한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 중에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제일 강조한 말씀이 뭐냐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말씀이에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네 능력대로 될지어다’도 아니고 ‘네 팔자대로 될지어다’가 아니에요. ‘네 운대로 될지어다’도 아니에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위대한 말씀이에요. 인간의 운명이든 팔자든 가난이든 질병이든 과거든 실수든 그의 타고난 얼굴색이든 인종이든 이것이 믿음의 위력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심지어 하나님도 사람의 믿음을 막지는 못합니다. 어패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님도 인간의 진지한 믿음은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살리라 ’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입장을 가지고 자기의 관점대로 예수님을 해석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서 자기의 의견을 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입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국적인 가치를 전하고 또 해방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해방신학이라는 엉뚱한 것을 전하고 또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사람의 욕심에 어필하는 그런 가르침을 전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의견을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서 전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놓아드려야 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우리가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해할 때 그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세상 나라를 이루려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지 이 세상의 영광이나 이 세상의 인간적인 개혁을 가르치신 것은 아니에요. 하도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미국을 탓하고 부자를 탓하고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 예수님이 가난한 자였어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울분을 자극한다든가 그들의 상처를 자극한다든가 심리적으로 그들을 움직여서 인기를 얻으려고 한다든가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든가 계급투쟁을 하려고 한다든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파퓰러즘을 가르치지 않으셨고 미움을 가르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셨지만 가난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예수님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좀 더 잘 살게 만드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세상을 공평하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느냐에 예수님의 관심사가 있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셨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시고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지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게 하고 바르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다면 삼년 반은 너무 짧은 것입니다. 삼십 오년을 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년 반 공생애를 사시고 십자가를 지셨어요.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고자 오셨느냐를 발견해야지 그러지 않고 예수님을 인용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그건 모든 사람이 범하는 실수이고 예수님을 동네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예수님의 정신 중에 우리가 본받아야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절대평등주의입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어요. 부자든 가난한자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믿음이었어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믿음입니다. 절대적인 평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은 칭찬하시고 유대인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어요. 유대인이라고 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이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차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기이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나와요. he marvelled-놀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 파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십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하나님을 놀래시게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없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을 놀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수님이 믿음을 보고 놀라셨어요. 그래서 이 백부장의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없는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성과 그들의 나약함과 게으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이 믿음을 가지니까 순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키우겠다고 교회를 찾아가고 믿는 사람들을 만나서 믿는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내가 가진 믿음조차도 까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문화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열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왜냐하면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보면 경건의 모습은 자라나는데 경건의 능력이 생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데 익숙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다가 오히려 믿음을 까먹어 버립니다. 교회에 깊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목회자가 노회 정치와 총회 정치에 관여하다가 목회자의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이건 목회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에요. 이 백부장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놀라셨어요.
. 그것이 인간의 믿음입니다. 얼마나 세상에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참됨 믿음을 보실 때 멈추시겠습니까. 누가 나를 만졌느냐, 그 말은 누가 믿음으로 나를 만졌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믿음이 있느냐 그걸 찾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끌기를 원하시면 다른 비결 없어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우리는 다른 것은 다 쌓으려고 하지요. 지식 ․ 실력 ․ 경험 심지어 인격까지. 다만 쌓으려고 하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지식과 인격과 교양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명문학교에 가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문학교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어떻게 키우느냐. 믿음을 키우려면 때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없는 사람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을 흉내 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들의 제스처를 흉내 내면 안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어디서 오느냐. 들음에서 옵니다. 들음은 어디서 오느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밥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제도 밥을 먹고 오늘도 밥 먹고 아마 내일도 먹을 겁니다. 밥을 먹는 유일한 이유는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먹었는데 왜 또 먹느냐. 배고프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제도 들었는데 왜 또 듣느냐. 영적으로 배고프니까. 들으면서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이미 아는 말씀이지만 웃으면 복이 오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면 믿음이 옵니다. 할렐루야.

 

기쁜소식교회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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