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는 가장 친숙한 예수님의 비유이지만 이것이 종말론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가르침.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거의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생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오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상당부분은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결혼에 대한 것이든 소유에 대한 것이든 직업에 대한 것이든 내일에 대한 것이든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은 임박한 종말을 전제로 했을 때 이해가 됩니다. 문자 그대로 적용했을 때 문제에 부딪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에 대한 것이든 공부에 대한 것이든 돈,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건강한 균형을 잡아야 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영원히 젊을 것처럼 내가 영원히 내 소유를 누릴 것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의 인생은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소속된 것은 아니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객과 같은 존재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정일랑 두지 말고 미련일랑 두지 말자’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고 교회를 맡았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충실해야 됩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학교도 안 다니고 직장도 안 다니고 집안 살림도 안 하게 한다면 그건 이단이나 하는 일입니다.
건강한 균형을 잡아야 되는 이유가 참으로 중요한데 오늘 이 비유에서 몇 가지 주목할 것은 첫째는 주께서 달란트를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주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당신의 뜻에 의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태어나게 해달라고 해서 태어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어느 누가 태어나겠다고 선택했습니까. 그러나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인생뿐만이 아니고 거의 모든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남자나 여자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외모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성격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우리 인생의 많은 것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셨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내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으면 거기에 우리의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신 다음에 떠나가셨다는 사실입니다. 14절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새’ 또 주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주신 시간을 뜻합니다. 사람에게 일정 부분의 기회를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일정분량의 자유를 사람에게 맡겼다는 뜻입니다. 저희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에 광고문을 붙이는 곳에 ‘여러분 자녀분의 공부를 시켜드립니다.’ 이런 광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심히 읽어봤더니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 부모가 옆에서 감시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 꼭 우리 아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 곁에 앉아서 지켜보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의 믿음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당 분량의 자율권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달란트를 맡기고 떠나셨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위임입니다. 자율권을 우리에게 맡기고 주님이 가셨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자율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평생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것마저도 누가 종용하지 않으면 겨우 하는 사람들이 있고 헌금이든 봉사든 전도든 주님에 대한 섬김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없이 하고 부득이 하고 누가 지켜볼 때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뿐만이 아니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 의를 행하는 것이 남들이 지켜보고 남들이 인정해 줄때에야 겨우 할까 말까 하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원해서 자기가 즐겁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주님이 얼마만큼의 달란트를 주셨느냐가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이 기회와 찬스를 얼마만큼 최대화 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여기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고 떠나가셨습니다. 그 기간은 우리에게 주신 유예기간입니다. 일정한 분량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자유가 있고 여기에 우리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여기에 우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최대화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뭔가 불편해 하고 귀찮아하고 그리고 부담스러워하고 겨우 억지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느냐, 두 달란트를 받았느냐, 한 달란트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더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해서 더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주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잠시 맡기신 것뿐입니다. 결국은 주님에게 돌려드려야 될 것입니다 .내 몫이 되는 것은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지, 달란트 자체는 주님 것이고 잠시 맡기신 것이고 다만 그 기간 동안에 그것을 우리 것처럼 책임 있게 돌봐야 될 의무가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유하지만 그 자유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날이 옵니다. 그게 바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유하지 않다면 심판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정량의 자유가 있어서 이것에 근거해서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꾸지람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세 번째로 주목할 것은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집에 일하는 분이 상주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보낸 시간보다 일하는 누나들과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일하는 누나가 집을 나가버렸어요. 그때 제 나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제가 혼자 집을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는 오시지 않고 저는 겁이 나고 그래서 대문을 바라보고 마루에 앉아서 도대체 어머니가 언제 오실까 이렇게 지켜보던 기억이 납니다. 곧 오시겠지, 캄캄해지기 전에 오시겠지. 그런데 정말 캄캄해지기 전에 어머니가 할머니와 같이 돌아오셨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그러나 그때의 두려운 감정은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방치된 아이와 같을 것입니다. 고아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애들을 집에 혼자 내버려두면 첫 한두 시간은 신이 나서 놉니다. 컴퓨터 게임도 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참견할 부모님이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신이 나지 않아요. 컴퓨터 게임도 재미가 없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별로 재미없어지고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치된 아이들에게 자유는 특권이 아니고 소외요, 버림받음이요, 고독함이요,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소외입니다. 인간은 내 뜻대로 내 멋대로 살고 싶으니까 내버려두라고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내버려 두면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소외요 고독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극빈곤층이 존재하는 이유는 재정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극빈곤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질병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가 일을 하지 못하고 병들어 누워있기 때문에 가난한 집이 많습니다.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고 질병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결손가정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없어요. 집을 나갔어요. 애들이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삽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고 가정의 해체의 문제입니다. 있어야 할 분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해체되고 결손가정이 되니까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니고 자녀들에게 큰 아픔이 되고 외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복지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정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제가 LA에서 전도사로 섬길 때 학생 중에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사내아이가 있었어요. 당시 중학교 1,2학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이 아이가 중등부에서 분반공부를 가르치는 남자선생님을 형처럼 따르고 좋아했어요. 그래서 토요일마다 이 형을 만나서 같이 농구를 하고 같이 놀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토요일에 이 아이가 교회에 일찍 와서 그 선생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 사무실에 현관을 볼 수 있는 CCTV 모니터가 있는데 이 아이가 그 모니터 앞에서 떠나지 않고 선생님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가 옆에서 보다가 민망해서 말도 시키고 하는데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 모니터만 지켜보고 있어요. 마치 옛날의 RCA 로고에 축음기 앞에 강아지가 앉아 있는 것처럼 이 아이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빠가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빠가 없다보니까 누군가 아빠를 대신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거예요.
아버지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 부모의 역할, 그렇게 소중합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오느냐, 뭘 하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결국은 있어 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찾아와 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찾으러 올 것이냐. 아니면 우리는 홀로이냐. ‘나는 이제 성인이 됐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돌아볼 필요 없습니다.’ 아니면 ‘나는 자유가 소중하기 때문에 누가 나를 간섭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적어도 우리의 인생의 수고에 대해서 누군가가 그것을 봐주고 평가해줄 분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이 비유에서도 주인이 왔을 때 ‘내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보소서’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자기의 인생의 수고와 열매를 봐주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것을 보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생의 최대의 상급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수고를 보시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도 우리에게 잘하였도다 라고 칭찬할 분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허무한 인생이 됩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가 나이를 먹고 광기가 드니까 들판을 헤매고 다니면서 외쳤다고 합니다. 내가 황제입니다! 내가 황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도 자기가 이만큼 성공을 거두고 이만큼의 결과를 거둔 것을 누가 알아주기를 필요로 했다는 얘기인데 그런 진시황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말해 줄 분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 우리의 수고를 보고 인정하고 칭찬해 줄 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분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허무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리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악인들에게는 두려움이지만 주님을 믿고 섬기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마라나타’ 마라나타라는 말은 초대 성도들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주님이 어서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정말로 기쁜 일이에요. 할렐루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기쁜소식교회/ 김영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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