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성

오발탄

빛에스더 2008. 7. 27. 15:21

 

             

             

             

              

             

 

 

오발탄-Aimless Bullet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유현목 감독의 1961년작 영화 '오발탄'DVD를 통해서 보았다. 한인타운의 상점에서 구입했는데, 미국의 영상물 체인점들만큼 크지는 않지만 구비해놓은 한국 영화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영화가 최근 질적으로 양적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있다는 것은 알지만,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설레이는 마음으로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요즘이다.

 

과거의 영상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 외에, 영화를 보면서 금방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열정과 감수성을 지녔던 내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고 싶은 마음과 더 관련이 있다. 어릴 때 보았던 외국영화들을 요새 자꾸 구입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고른 영화가 오발탄이다. 멀리 떠나온 과거를 되돌아볼 시간여행을 위한 한턱을 스스로 내기로 했다. 

 

영화원판은 이미 분실되었으나, 이 작품이 과거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덕에 미국도서관에 자료로 보존된 필름을 가지고 DVD를 만들었다는 자막설명. 영화를 보기도 전에 벌써 초라하고 지난한 전후 한국영화의 역사를 엿볼수 있다. 영화의 장면 배경들을 마련해주는 60년대 초반 한국. 서울. 명동. 청계천. 그리고 Wild West가 따로 없을 정도로 삭막하기 짝이 없는 도시의 철로변 풍경. 내 어릴 적의 풍경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나 자신. 오래된 꿈속을 헤매듯이 영화를 보면서 빛 바랜 영상들을 뒤지고 있다.

 

요즘의 SUV 차량보다 오히려 중후하고 멋지게 보이는 지프차들이 갑자기 낯익다. 전후 폐허 속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뭔가 분주한 열기가 새삼스럽다. 바로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내가 성장하던 유년시절의 추억 속 밑그림이 흑백 화면을 통하여 갑자기 선명해진다. 영화 속 대사와 연기는 구식이지만 사람들의 모습이 과히 낯설지 않다. 세트, 의상, 대사, 연기 할 것 없이 어느 구석에도 지워지지 않는 가난함이 대충 막은 판자집 지붕처럼 홀가분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갈망과 꿈이 숨길 수 없이 끓어오르는 얼굴들. 미처 꺼지지 않은 불씨가 바람에 날리는 듯한 삶의 표정들. 그 표정들은 일상의 조그만 자극에도 화르륵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 창조에는 목적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창조주가 목표한 표적에서 빗나간 인생처럼 느껴진다면? 실수로 창조된 인간존재라는 회의에 대해서 창조주는 어떤 응답과 구원의 자비를 베풀 수 있을까? 만일 그 인생이 목표를 벗어나서 우주에 던져진 채 유성처럼 덧없이 어지럽게 달려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그런 신이라면? 실패와 절망이 이어지는 인생을 살게 될 때 인간은 그런 질문을 던질 권리가 있는게 아닐까?

 

사랑을 포기하고 양공주가 된 여동생, 상이용사에 실업자인 남동생, 만삭의 아내, 실성해 누운 채 어디론가 "가자!"는 말만 헛소리로 하는 노모, 새장에 갇힌 듯 판잣집 안에서 하루종일 혼자 놀며 기다리고 있다가 새 신발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딸.

 

이런 상황이 패잔병처럼 후줄근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주인공 김진규, 그가 분한 주인공 철호가 만나야 하는 일상의 배경이다. 매일같이 주판을 들고 계리사 사무실로 출근하는 철호가 월급봉투를 받아와서 아내에게 그대로 건네준다. 모범가장이다. 그러나 받아드는 아내의 얼굴에서 반가운 기색은 없고 수심이 걷히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들의 지친 삶을 달랠 수 없을 만큼 부족한 액수라는 것을 곧 짐작할 수 있다.

 

관객이 영화 내내 어떤 가능성이나 희망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그 기대는 숨막히게 조여드는 운명의 손길 아래 잔인하게 짓밟혀가고, 미래의 가능성을 향한 문들이 하나씩 닫혀 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절망으로의 여정을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호흡곤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내 산고를 치르던 아내를 잃은 철호는 양공주 여동생이 마련해준 돈으로 장례를 치르는게 아니라 엉뚱하게도 치과를 찾아간다. 영화 내내 찌푸린채 그늘져있던 그의 고뇌하는 표정은 현실의 온갖 부조리한 악조건 가운데 아무 것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자의 낙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치통이라는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안면의 신경줄을 모두 움켜잡고 놓지 않는 아픔이 삶의 고통의 주범일 리는 없다. 치통을 해결한다고 해서 그의 고뇌가 사라질 리는 없지만 고통의 원인을 한꺼번에 제거하겠다는 듯이 미루었던 치과치료를 받는 것은 운명에 대해 그가 할수 있는 유일한 반항의 몸짓이다. 눈물겨운 자학적 방편이 그에게 남아있을 뿐인 것이다. 삶을 선물로 준 창조주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인생의 온갖 고통까지 덤으로 선물했다는 이해할수 없이 부조리한 은총에 대해 그것을 더 이상 짊어지기를 거부하겠다는 결연한 선언이다.

 

이런 철호의 행위에서, 구원의 희망을 향해 혹시나 하고 남겨두었던 카드를 꺼내 신과의 대결에 마지막으로 써버리는 인간 실존의 외침이 들린다. "마치 벗겨지지 않는 등의 짐을 내려놓으려고 몸부림치다 스스로 상처 입고 뒹구는 노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부여한 운명을 따라가기를 거부한다" 고 외치듯이 입안 가득 핏덩어리를 물고 침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앓던 이들을 무리하게 모두 뽑은 철호는 자신을 노상 괴롭히던 만성적인 치통에서는 마침내 해방되지만, 승리자의 위풍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이제 철저하게 자학하고 상처 입은 채로 병원 문을 나선 패배자이다. 마취제 기운으로 몽롱해지는 상태에서 무작정 택시에 올라탄 그는 방향을 묻는 택시기사에게 술취한 사람처럼 오락가락하는 대답을 내뱉는다. 실성한 노모와 어린 딸이 있는 해방촌으로, 은행강도범이 된 동생이 붙잡혀 조사 받고 있는 중부 경찰서로, 죽은 아내의 시신이 있는 대학병원으로.

 

그러나 어느 곳에도 그를 구원해줄 희망이 없는 탓에 "아무데나 가자"라고 결론 아닌 결론을, 과연 오발탄의 인생답게 내리고 영화는 종영된다. 현실에서 한발짝도 움직여 갈 수 없다는 절규로 마감된 여운이 관객들의 귓전에 남아있게 된다.

 

DVD 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육성으로 들은 유현목 감독의 말 대로라면 영화 가운데 명동 성당의 종소리, 기독교 전도대가 행진하며 부르는 구호와 찬송가 등 구원을 소개하는 상징들이 삽입되어 있으나 그것들은 스쳐가는 암시이고 장식적인 소도구로 쓰일 뿐, 영화의 중심테마는 아니다. 20세기 후반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영화는 절망적인 상황을 울타리로 설정해 놓고 있고 감독은 거기에서 벗어날 의도가 전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과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처지를 여러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관객의 짐이 그만큼 무거워진다.

 

영화가 전해준 절망에 빠져든 가련한 관객들은 영화관을 나서면서 우울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희망에 대해서 애써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안쓰런 몫을 얻게 된다. 어떻게 하면 절망을 극복하고 현실에서 희망에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실감나게 다가오고 각자 답을 찾는 도전이 주어진다. 

 

목표가 없는 오발탄이 발사된 후 결국 힘이 기진해서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받아주는 하느님의 손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구원은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힘이 있지 않은가. 재앙으로 가득찬 판도라의 상자 밑에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의 나의 생각이고,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렵게 만든 영화를 영화관의 쿠션도 없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보던 한국 관객들, 60년대를 시작하던 시절의 그들에게는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학생혁명으로 분출된 화산 같던 사회변혁의 기운이 곧 이은 군사혁명의 가차없이 내리치는 채찍 아래 억눌려버렸다. 어떤 남은 희망을 그들은 품어 안고 살아야 했을까?

 

실제로 영화 오발탄은 갑자기 들어선 군사정부의 비이성적이고 무자비한 검열의 잣대 때문에 제때 개봉되지 못했던 사연이 있다. 민주화의 염원이 꺾이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위축된 시대가 시작되고 그로부터 20년 동안 억압적이며 뒤틀린 현실 속에서 경제발전에 매진한 수출 입국의 간판이 우뚝 솟았다. 그런데도 멍든 가슴과 몸 속에서 꿈틀거리며 창조의 비전과 의식을 버리지 않게 만드는 한줄기 식지 않는 희망의 샘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4.19 학생혁명에서 경험한 민주화의 꿈에 기인하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70년대와 80년대를 넘어오던 시기에 나도 청년기에 들어 사회 성원으로서의 의식이 자라났다. 그 시절에 구속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창조의 집단 무의식 쪽에 동화되어 갔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시대의 열정과 갈등과 염원이 섞여 풍겨내는 처절하고 달콤한 피비린내를 결국에는 맡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택시에 올라탔지만 방향을 잃고 아무데나 가자고 외치던 오발탄 승객, 철호의 외침은 실성한 노모의 외침을 닮아있기는 하나, 모친의 그것은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무의식의 자동적인 발로일 뿐이고, 철호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원은 실성한 어머니에게보다는 고통스런 의식에서 벗어날 길 없는 아들에게 더 절실하지만, 절실할수록 더 한없이 멀리 있는 신기루처럼 여겨진다. 

 

새 신발을 신기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애처롭게 기다리는 어린 딸, 혹은 모체와 생명을 바꾸어 갓 태어난 아기를 통해서 구원의 얼굴이 드러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삶의 무게에 밀려 영상의 충격에서 멀어져 갔다 하더라도, 그들의 답 찾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어떤 결실을 보게 된 것일까.

 

그 시절 이후 한국사회가 겪어온 역사의 격랑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희망을 모색하며 폐허 속에 숨은 실같은 가능성을 밟아 방향을 찾아가는 행보를 계속해 온 것이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이 오발탄 같은 인생임을 자조하던 1961년에서 4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데 성공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같은 물질의 성취와 시간의 흐름이 절망의 상처와 기억을 아물게 하고 그간의 노력을 보상하는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영화에서 몹시 충격적인 장면 하나를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도심의 그늘을 흐르는 청계천의 한 다리 밑을 주인공이 지나갈 때, 

목을 매달아 자살한 여인이 내버린 소품처럼 매달려 있는 모습이

주인공의 움직임을 따라 스크린에 잠깐 스쳐간다.

움직이지 않는 여인의 등에는 칭얼거리는 젖먹이 아기가 포대기에 싸인 채 업혀있다.

 

서울시가 열심히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던 때가 70년대 초라고 기억한다. 영화에 묘사된 것과 같은 고된 절망과 아픔에 덮개를 씌워 덮어버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그때 청계천은 도로 밑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가 최근 요란한 열광과 함께 다시 태어난 사실이 미국에 건너와 사는 내게도 적지 않은 감회를 일으킨다. 내가 어릴 때 불편한 징검다리를 건너며 보았던 냄새나는 구정물이 아니라 어디선가 끌어온 맑은 물이 흐르게 된 사건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아낙네들의 빨래터는 더 먼 옛날 이야기이고 이제는 산책로를 만들어 여가를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는 뉴스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 중에서 아기를 업은 채 목을 맨 여인네의 이미지가 과거로 돌려놓은 내 의식 가운데 다시 클로즈업된다. 미래를 등에 업고 있지만, 현실을 먼저 포기한 여인. 그 여인이 버린 삶은 몇십년 간 땅 밑에 묻혀 잊혀졌고, 새로 모습을 드러낸 깔끔하고 세련된 청계천변에서 이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60년대의 관객의 입장에서는 해진 신발을 신은 철호의 어린 딸이 혼자 집안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그 아이가 새 신을 신고 밖에 나가 노는 날이 오기를 상상하는데서 희망의 단서를 찾지 않았을까. 새 신을 신겨주는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철호가 감수해야 했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오발탄의 운명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관객들 자신도 철호의 가족과 함께 미래의 방향을 찾아 비로소 걸어 나서게 되리라는 믿음이 동반되는 희망이다. 낡은 신으로 제자리 뜀질만 연습하는 딸아이에게는 새롭게 앞으로 내달리는 견인차가 되고싶은 욕망이 내재하고 있다.  

 

아내를 잃는 최악의 절망 밑바닥에 도달한 철호에게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의 불씨가 남겨졌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 그것이 또한 관객에게 소감 한마디 정도로 끝나지 않는 삶의 도전과 의무가 된다. 아내가 남기고 간 새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철호는 의식을 회복하면 그 생명을 일으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그에겐 아직 철저히 절망하고 포기할 권리가 없다. 인간실존에 부여하는 희망이라는 줄기찬 임무(mission)가 창조주로부터 거듭 내려온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는 절망에 빠졌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명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구실을 통해서 그는 희망을 가질 것을 강요당한다.

 

그렇다. 절망상태에서 우리는 희망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울려나오는 것을 들을수 있다. 그러나 희망에 의해 견인되는 인생이 사실은 축복임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앙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실존은 절망을 극복하는 힘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진정한 희망은 끊임없는 자기희생을 거름으로 해서 언젠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희망은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은 위로받을 때가 있다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지금 주린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 지금 운다고 해도 웃게 될 시간을 기다릴수 있기 때문에

희망은 절망과 고통을 견딜 힘이 되어 시련의 시간을 지켜준다.   

 

 

 

[ 출처 : bluetree

글 : austin 부제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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