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Art

빛의 화가 렘브란트

빛에스더 2008. 6. 19. 04:32

 

  

 Self Portrait, 1629, oil on canvas, The Mauritshuis at The Hague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33, oil on wood, Pinakothek at Munich.

 

 

Woman Wearing a Gold Chain, 1634, oil on panel, Museum of Fine Arts, Boston.

Self Portrait as a Young Man, 1634,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The Sacrifice of Isaac, 1635, oil,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Danae, 1636,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Balaam's Ass, 1626, Musee Cognacq-Jay at Paris.

The Music Party, 1626, oil on wood, Rijksmuseum at Amsterdam.

The Rich Old Man from the Parable, detail, 1627, oil on wood, Gemaldegalerie, Berlin.

 

 

성경그림의 개척자 렘브란트 


17세기 회화 부문에서 기독교적 주제는 중요한 비중을 잃어버렸다. 다른 미술에 비해 기독교 미술은 수요도 적었고 전문가들도 적었다. 렘브란트와 그의 제자들을 빼놓고는 전무한 형편이었다. 대신 초상화를 비롯하여 풍경화, 일상모습을 묘사한 장르화, 정물화,해양화,거리풍경 그리고 동물화 등이 인기영역으로 떠올랐다. 화란 시민들의 일상생활은 화가들의 관심에서 떠날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화란의 문화풍토와 관련되어 있다. 일상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에 칼빈주의적인 문화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칼빈은 회화예술은 보이는 세계의 묘사에 치중할 것과 개인 주택이나 공공사무실의 장식 용도로 제작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칼빈은 회화예술이 종교에 봉사하는 어떤 권리도 부정하였다.  <기독교강요>의 내용대로 하나님을 형상적으로 축소하는 것은 그 분의 신적 권능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칼빈의 권면에 따라 화란교회는 교회내의 어떤 장식도 철저히 배제하는 극도의 단순성을 띠었는데 이는 화란교회

 


의 칼빈주의적 엄격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적 테마가 급속히 감퇴해가는 시대에 성경그림을 본령으로 삼은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출세나 명성, 그리고 경제적으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렘브란트는 평생 유화 160점, 에칭 80점, 드로잉 600점 등 850여점이나 되는 성경그림을 제작하였다. 미술사의 찬란한 보석으로 기록되는 명작을 남겼다.
성경그림에서 시작하여 성경그림으로 생애를 장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뷔작 <스데반의 순교>(1625)로부터 시작하여 최후작이 <탕자의 귀향>(1669)이었던 것은 그의 예술세계의 요체가 무엇이었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신구약 전권을 묘사한 사람은 렘브란트밖에 없다. 성경을 그리는 것을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으로 여겼다. 성경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저장고였다. 거기서 렘브란트는 생명의 양식을 얻었고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그의 스승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역시 성경적인 주제를 적잖이 다뤘다. 이탈리아의 화풍에 의존하여 화란 바로크의 기반을 다진 라스트만은 역사적 관점에서 성경의 줄거리를 그렸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라스트만의 태도와 딴 판이다. 렘브란트의 경우 역사적 관점 대신 신앙적 고백의 형식을 띠었다. 그 스스로 그림의 주인공이 되어 성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기도 했다.  <십자가에 올리심>에선 로마군병으로, <십자가에서 내리심>에선 예수의 시신을 내리는 사람으로, 그리고 <세례 요한>에선 요한의 설교를 주의해서 청종하는 사람으로 각각 등장시켰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데 만족했다기 보다는 영적인 눈을 갖고 성경의 현장으로 덤벙 뛰어들었다. 이것이 성경적 주제를 그린 다른 화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는 초창기부터 성경그림에 착수하였다. 대작을 제작하여 그의 정열과 관심을 쏟아부었다. 가령 불후의 출세작인 <조합원들 syndics>이나 <야경꾼>과 같은 대형 집단초상화를 <눈먼 삼손>,<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탕자의 귀향>과 같은 성경그림에도 똑같이 적용하였다. 판화도 젊었을 때는 소품으로 제작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더 크고 정교하게 제작하였다. <백굴더 프린트>,<세 십자가> 등. 또한가지 그의 대부분의 성경회화작품은 누구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매장>,<부활>, <갈릴리 호수의 폭풍> 몇 점을 제외하고는 솔선해서 그렸다. 그가 남긴 수많은 성경작품들은 애호가나 마켓의 요구에 의해 창작된 것이기보다는 그 자신이 원해서다. 좋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주제를 평생 동안 놓치지 않았던 것은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소명으로 생각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수익원은 주로 소형판화로 얻은 판매대금이었다. 미술애호가들은 성경내용을 생생하게 묘사한 에칭작품들을 구매하였는데 이 열광적인 애호가들은 렘브란트의 손으로 찍은 판화, 설혹 그것이 같은 판형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가리지 않고 구입하였다. 판화가 생계에 보탬을 주었으나 소묘나 유화는 사정이 달랐다. 사람들의 관심 밖이어서 완성된 족족 창고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성경에 관한 태도가 단순히 예술적인 흥미 때문인지 아니면
신실함 때문인지 궁금하다. 한 평생 성경그림을 한 그로서는 어떤 쪽에 더 비중을 두었을까.


예술적 흥미와 신앙적 열심의 어울림


렘브란트의 경우 예술적인 흥미와 신앙적인 열심의 두 요소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적 재능을 자신을 자랑하려는 데에 사용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하여, 그 분의 영광과 존귀,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데에 사용하였다. 신실한 사람에게는 직업과 사역의 구분이 따로 없다는 것을 렘브란트에게서 배우게 된다.
예술은 그 분의 나라를 알리고 전하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성경그림속에 하나님의 용서, 사랑, 자비,은혜, 그리고 그리스도의 긍휼, 온유, 치유, 구원, 승리를 각각 나타냈다. 렘브란트의 작품이 찬란한 기독예술의 유산으로 전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예술적 탁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흔히 접할 수 없는 성경적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화가도 성경을 그만치 감명있게 전달하지 못했다.
그는 <아브라함의 제사>1635년과 1655년에 각각 제작하였다. 전자는 유화로 제작된 것이고 후자는 에칭으로 제작된 것이다. 같은 주제를 그렸을지라도 얼마만큼 영적인 이해에 차이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유화의 경우, 이삭을 바닥에 눕히고 번제물로 드리기 직전의 숨 막히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왼손으로 이삭의 얼굴을 짓누르고 오른 손으로는 칼을 들이대고 있다. 이 순간 돌연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오른 손을 잡으며 제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칼을 놓치고 있으며 움칫 놀란 표정으로 천사를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바로크풍의 과장된 몸짓, 높은 명암대비, 극적인 연출로 번제드리는 아브라함의 외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칭의 경우, 아브라함의 제사를 훨씬 더 호소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역시 아브라함은 한 손에는 칼을 잡고 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이삭의 눈을 가리고 있다. 허리를 숙인 이삭은 아버지의 허리춤에 얼굴을 내밀고 처분만을 기다리는 애처로운 모습이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역시 천사가 나타나 만류한다. 다급한 쪽은 오히려 천사인 것같다. 천사는 아브라함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을 다 쏟고 있는 듯하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칼 든 손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눈을 가린 손을 제지하고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시선을 천사에게 맞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는 천사의 개입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어리둥절한 표정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비로소 풀어주는 역전의 순간을 렘브란트는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천사의 날개가 유난히 거대하고 웅장해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나타내는 이미지다. 화려한 색상의 유화작품과 달리 이 에칭은 색깔도 흑백으로 되어 있고 동작도 크지 않다.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은혜의 날개와 은혜의 빛의 조명이 어우러져 비시각적인 내용을 시각적으로 옮겨내고 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성경을 얼마나 영적으로 농밀하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렘브란트는 기독교적 내용을 점점 더 명료하고 개인적으로 그 의미와 깊이를 발전시켜갔다. 이것은 미술사에서 볼때 아주 특별한 측면이다.

 

성경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


역사화가였던 라스트만의 경우 성경의 줄거리들을 활기찬 자연주의(lively naturalism)와 고고학적 정확성(archaeological precision)을 기본으로 재현하였다. 렘브란트도 이같은 방법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성경은 드라마틱한 소재 이상의 소스였다. 성경 텍스트를 보다 깊은 통찰과 서술적인 구체성을 가지고 해석과 아울러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속하신 진리의 책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언약이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계획을 이루신 확실한 증거였다. 말하자면 렘브란트는 성경속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 분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찾았다.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되시고 메시아가 되신다는 고백이 묻어 있다. 그러기에 그는 성경그림을 도저히 기계적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믿음의 고백이 개인적이듯이 그의 성경그림도 개인적이었다. 온 마음으로 예수를 섬기는 사람만이 고백할 수 있는 진실과 신령, 그리고 가슴속 깊이에서 우러나온 사랑이 깃들어 있다
.
그런 예가 <십자가에서 내리심>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반종교개혁의 화가 루벤스(Rubens)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다>와 비교된다. 루벤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을 모방하여 그리스도를 영웅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그리스도는 다르다. 축 늘어진 시신은 죽음의 고통을 여실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간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하여 관객이 그리스도의 실제 죽음과 수난 사건에 시선을 맞추도록 하였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사 53:2)는, 우리 죄악을 담당하시려고 버림받고 징벌을 받은 대속자로 묘사되었다.  
렘브란트의 작품에는 바로크 시대의 가톨릭 미술과 비교되는 개신교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가령 루벤스의 예술은 교회의 권위와 화려함, 그리고 성인들과 순교자, 특히 반종교개혁의 이념들을 강조하였다. 사람들에게 종교적 선전으로 흥미를 주려고 했던 예수회의 방침에 따라서 루벤스의 예술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과장된 수법으로 나타냈다. 가톨릭의 제단화에서 보이는 우람한 도상적인 스케일, 그리고 과시하는 듯한 몸짓은 사라지고, 렘브란트의 작품에 있어선 성도들의 말씀묵상을 돕기 위한 고요한 재현(quiet representation)이 강조된다.
도르트신경(1618-19) 이후 개혁교회의 교리규범이 확고히 세워지자 렘브란트도 이 교리에 따라서 성경의 완전함을 믿고, 삶의 우선된 가치를 성경에 두었으며, 그것이 그의 예술까지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 그의 작품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능함을 고백하는데 이것은 칼빈의 신학에 얼마나 크게 영향 받았는지 알려준다. 더욱이 선택된 민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구약을 강조하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한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 렘브란트는 어떤 화가도 해본 적이 없는 구약의 족장들,사사들, 그리고 제왕들을 두루 등장시켰다.
그렇다고 렘브란트의 예술을 개신교 운동 전체와 동일시하는 건 성급한 판단이다. 칼빈주의나 루터주의나 종교예술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주제들을 회화적으로 나타내는 것에도 무관심했다. 렘브란트의 경우, 유일하게 개신교의 경건함을 나타내었다는 측면에서 예외로 간주될 뿐이다.


작품마다 신앙적 고백 담아내


그의 성경그림은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1630년대 아직 라스트만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시절에, 그는 삼손 이야기와 같은 주제를 선호하였다. 여기서는 영웅적이고 역동적인 표현을 골간으로 바로크 양식의 특질이 두드러졌다. 40년대와 50년대 초기에 그는 보다 내면적인 서정적인 테마를 기용하였다. 요셉과 다니엘 그리고 소년 그리스도를 자주 그렸다. 이때는 보다 성숙해진 렘브란트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의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를 그림의 모델로 세우기도 했다.
숨을 거둔 해까지 그는 믿음의 눈으로 성경그림을 계속해갔다. 이 시기 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화려한 옛 명성을 과거속에 묻어둔 채 외로운 노인으로 쓸쓸하게 지냈다. 게다가 아내를 일찍 떠나보내고 자녀마저 5명씩이나 잃어버리는 역경속에서, 그리고 재산을 모두 차압당하는 경제적 고통속에서 렘브란트는 꿋꿋하게 그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해갔다
. 이때만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감동적으로 표현한 적도 없었다. 신앙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작품도 함께 심오해졌다. 외향적이던 작품세계는 점점 더 내면화되었고 관객의 가슴을 사무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탕자의 귀향>은 그의 예술정신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아버지의 유산을 강탈하다 시피 물려받은 탕자가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거지가 되어 돌아와 아버지의 용서를 비는 내용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험많고 죄많은 인간을 용서하셨듯이 렘브란트는 자신을 탕자로 묘사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회개와 죄사함을 간구하였다. 재산, 명예, 건강, 가족 등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렘브란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값진지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 곁을 떠나갔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끝까지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난의 어둠이 짙어갈수록 더 많은 은혜를 체험하였다. 이렇듯 렘브란트의 예술은 그 자신의 경험과 영적인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며 발전해갔다.
(월간고신 2005.9)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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